이것도 직업병의 일종일까... 그동안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소위 프로그래밍/컴퓨터의 대가라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혹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한 적이 많이 있었다. 그러던 중 앨런 튜링에 관한 전기인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튜링을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컴퓨터가 처음 태동하던 시기에 수학자이면서 논리학으로 심취해있던 튜링은 자신의 독특한 시각으로 '계산 가능한 수' 라는 영역을 기계의 원리를 통해 증명해낸 사람이다. 독특한 시각이라고 말한 이유는 앨런 튜링은 천재들의 성격으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제한 채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과 접근법을 사용해서 이를 증명한다.
'계산 가능한 수'는 이 당시 논리학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논리학적으로 표현이 가능하다면 수식으로 표현함을 가능하며 이는 결국 결정론적인 문제로 귀결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통 알고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정된 순서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해당 문제가 논리적인 모순이 아닌 한 분명 이를 풀기 위한 알고리즘을 가지게 되며, 이는 결국 결정가능한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문제가 결정가능한지를 증명하려면 그 문제가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논리학이라는 것이 단순한 말장난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말뒤에 내포된 의미를 같이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를 수식과 연결을 짓게 되면 이는 더 복잡한 영역이 생기게 되며 이를 다시 기계에 이를 응용하는 단계까지 가서는 결국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튜링은 이러한 '수리논리학'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측에 소속하여 독일군이 만든 에니그마라는 암호기로 만들어진 암호를 푸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튜링은 이 암호를 푸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는 '기계로 만들어진 문제는 결국 기계로 풀어야 된다'라는 가정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연합군은 독일을 물리치게 되는데, 이 튜링의 역할은 가시적으로는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로는 실로 큰 업적이라는 평가를 후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게 된다. 타임지가 20세기의 위대한 인물 20인 중에 그를 선정했다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를 증명하며, 컴퓨터 업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튜링상 역시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후대에 이와같이 높게 평가된 그의 업적과는 별도로 당시의 튜링에 대한 평가는 그리 알려지지도 않고 주목받지도 못했었다. 특히, 다른 사람과 교류를 잘 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과 동성애는 튜링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그는 동성애로 인해 법위반으로 체포되어 화학적인 거세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이 시기의 튜링에 대한 기록은 세부적으로 나타나있지 않지만, 그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결과만으로도 얼마나 이를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컴퓨터에 대한 계산하는 기계에 대한 생각은 기계를 어린 아이로 취급하여 교육을 통해서 서서히 학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기계에 대한 관대함을 얘기하는 그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 잘못 계산하거나 실수를 하면 다시 이를 수행하게 하는데, 기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기계는 한정된 내용으로 한정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은 컴퓨터 역시 실수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하며 이는 사람이 실수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를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말은 너무나 인간적이라 이러한 잣대를 기계에게 역시 적용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할 만큼 급진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리가 기계에 의존적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어찌 보면 지금의 시대는 불과 50 ~ 60 년 전의 컴퓨터의 아버지들이 보기에는 어찌보면 그 시대보다도 더 불편한 것들이 더 많아진 시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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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지역이나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 많이 얘기한다. 문화는 상대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지만, 막상 그 문화를 피부로 접하게 되면 문화 충격이라는 단어처럼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을 접하게 된다. 진중권 교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내가 속해있는 한국이라는 문화를 가능한 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진중권 교수 스스로가 '좌파'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굳이 '좌파'의 시각에서 이를 바라봤기 때문에 이 책 내용 전체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자는 현재 한국의 문화나 사회가 아직은 성숙이 덜된 문자문화보다 구술문화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문자문화나 구술문화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 글자가 의미하는 대로 문서나 활자화된 기반을 가지고 구성원들이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문화를 문자문화라고 하며, 그와 반대로 언어나 감정의 기반을 중시하는 문화를 활자문화라고 한다. 문자는 객관성에 있어서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구술은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이라는 성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성격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감정적으로 글을 쓴 문자는 표현 방법이 문자이지만, 사실 그러한 표현은 구술문화라고 봐야 한다. 요근래 인터넷 댓글과 관련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데, 댓글에 감정이 섞여 있는 글들은 그 기반이 구술문화에 두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자는 활자로 컨텐츠가 변형할 때 정화되고 정리되는 형태의 표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객관성을 띨 수 밖에 없다.
저자가 습속이라는 의미의 하비투스로 표현하고 있는 한국의 습속은 이러한 구술 문화의 기반된 컨텐츠들이 다분히 많다고 보기 때문에 여러가지 사회적인 현상을 문자 문화와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다. 물론, 문자 문화가 더 좋고 구술 문화가 더 나쁘다라는 의미로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음식점이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한국 사람들은 쩝쩝대거나 후르룩대는 소리를 문자 문화하고 비교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저자 자신도 한국에 와서 보니 어느덧 이러한 문화에 익숙해지고 또 그런 문화가 더 몸에 맞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나도 예전에는 미처 눈치채지는 못했는데, 요새 음식을 먹으면서 의도적으로 이러한 소리가 가끔 들려 문득 이 책의 내용이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나도 한국사람이라 굳이 그러한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토머스 길로비치는 '인간 그 속기쉬운 동물' 이라는 책에서 문화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일본 문화에 대한 내용이 있다. 19세기 서양사람들이 본 일본은 '사람들이 게으르며 천성이 약하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부지런하고 꼼꼼하기'로 알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사실 지금 일본의 문화를 말하는 것도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고 전후 많은 노력을 한 결과 때문에 그 문화를 그렇게 바라보는 견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한 국가나 사회의 문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이 전파성에 의해서 전해질 때 다른 형태로 선입관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문화가 1세기만에 바뀌기는 힘들고, 사회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나 통념들이 파급효과가 그 이전보다 크게 작용할 때 외부에서 보기에 그 문화가 바뀌었다고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문화가 바뀌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는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전후 급격한 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았던 서구사회와 서구의 문명을 재구성이나 순화없이 받아들여만 했던 동양의 사회는 분명 모양은 쫓아가는 형태이지만, 그 습속 만큼은 어딘가에서 표현되고 이러한 표현들이 외부에서 보기에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인 현상을 배제한 채로 문화의 우수성을 따진다는 것은 쓸데없는 논리일 수 있으며, 그 독특함을 상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따름이다.
이책은 토론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진중권 교수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책 중에 하나이며, 그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은 나도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찌보면 많은 안티팬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이유는 그도 이 사회의 일원이면서 이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일런지도 모른다. 나로써는 '미학'이라는 낯선 분야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알리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고 싶다.

written by El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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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 들의 도시

문학 2009. 1. 20. 01:08

누구나 초등학교 (또는국민학교) 시절 들어보았음 직한 우리나라 속담. “눈가리고 아웅”, 오늘은 때거지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내용, 바로 포르투갈 작가 중 한명인 주제 사라마구가 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이다.

1. 내용은 이렇다. 어느 도시의 어느 한 사람을 필두로 전염병 처럼 번져가는 실명. 마른하늘에 날벼락 이라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정부는 이 질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미명아래 그들을 한 정신병원에 가둔다. 정신병원에서 자행되는 더러운 모습들. 눈먼 자들이 불을 내고, 밖으로 뛰쳐 나왔을 땐 이미 전 도시가 눈이 멀고 만다. 단 하나의 여자 (책에서 말하는 안과)의사의 아내를 제외하곤.

의사의 아내는 그의 남편과 몇 몇 실명한 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들을 돌본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과 도시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는 실명한 인간과 실명한 인간을 대하는 실명하지 않은 인간들 속에서 때론 실명한 것처럼 또 실명하지 않은 것 처럼 행동하며, 살아 남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진다. 마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2. 저자는 눈이 멀어가는 인간과 그들을 대하는 정부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과 이들이 이루는 사회(조직)을 그려내며 현실을 비꼬고, 의사의 아내에 인간의 선함을 그려냄으로써 부패한 현실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 주인공들이 눈이 먼 후 찾아가는 행복을 그리며,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인간의 목소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단어 아래 수 없이 자행되는 불법적인 악행들을 우리는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선한 소수의 목소리를 짓누기는 것을 보며, 우리는 눈먼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의심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3. 이 책의 구성이 상당히 독특했다. 독자의 집중력을 배가 시키는 구어와 술어가 구분되지 않는 문체. 누구인지 어디인지 알려 주지 않고, 특유의 묘사, 은유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하지만, 문제집 속의 답안지가 포함되어 문제를 푸는 재미가 떨어지도록 하는 것처럼, 책의 맨 뒤에 포함된 어느 교수의 설명은 저자의 의도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어, 독서 후 저자의 의도를 푸는 재미를 반감시켜버렸다. 

들리는 소리에 의지하여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본 모습을 보지 않고 손과 발로 형체를 생각하고, 찾은 먹이를 몰래 숨겨두고 혼자서 독차지하려는 눈먼자들의 모습. 잘못된 길을 바로 앞만 보며 걷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이제 그만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잘못된 길임을 인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나라가 되어야 겠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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