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지인으로부터의 책 선물과 그 즈음에 산 책의 제목이 모두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하나는 김애란이라는 80년대 생인 여성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달려라, 아비'이고, 다른 하나는 이병동이라는 40대의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적어놓은 일기장의 내용을 블로그 형태로 쓴 것을 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물론, '달려라, 아비'는 책 제목의 단편 소설 뿐만 아니라, 다른 제목의 단편 소설도 실려있으며 개인적인 느낌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라는 책의 내용은 50년대에서 시작하여 70년대 후반까지 저자의 어린 시절을 포함한 우리네 시골의 모습을 아버지의 일기장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며, 그 시절에 왕성하게 활동한 우리 아버지들의 생각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달려라, 아비'에 실려있는 단편들은 주인공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김애란만의 독특한 형태의 글쓰기라는 것이 느낄 만큼 그 내용이 새로왔다. 사실 난 '달려라, 아비'라는 소설을 읽고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기보다 (40대의 남자의 입장) 주인공의 시각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에 빠져들어갔다. 이는 마치 어느 한 곳의 시선에서 다른 시선(혹은 특정 시각에서 1분 간의 흐르는 시간으로 이동하는 동안)으로 이동하는 그 짧고 찰나의 순간에 그렇게 많고 다양한 생각과 느낌들이 주인공의 혹은 인물의 (나는 이러한 것이 저자의 생각과 느낌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왔다. 이는 마치 지금의 젊은 세대(2, 30대)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호흠과 단편의 모습만으로 다양한 언어와 표현으로 무겁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게, 또한 광활하지만 그렇다고 산만하지 않게 글로 만든다는 시각이 새로웠다.

'달려라, 아비'의 내용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난 택시운전을 하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녀가 아버지를 상상의 나래 속에서 표현한 것으로, 결말 부분에서는 미국의 또 다른 형제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사망 편지에서 전 세계를 달려온 (주인공은 아버지가 알지 못하는 목적으로 달리고 있다고 상상한다.) 아버지가 이제 미국에서 그 쉼없이 달려온 시간을 멈추고 비로소 쉴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끝낸다. 하지만, 주인공인 딸은 엄마에게 아버지에게서 듣지도 못한 '엄마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거짓으로 편지에 쓰여있다고 한다. (편지는 영어로 쓰여져 있었다)

이 단편 소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다른 소설 역시 주인공의 가정 형편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며, 어찌 보면 지금의 88만원 세대를 반영하듯이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삶에 대해 나름대로의 상상과 희망을 가지고,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니, 보는 이에게는 참으로 힘들 것 같다고 생각들게 만들지만, 이들은 정작 자신에 대해 연민보다는 이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결코 힘들지 않게, 그리고 삶을 그리 단순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은 보면 볼수록 알고 싶은 젊은 세대들의 상상력에 궁금증을 더해주게 만든다.

40대의 가장이 자신의 아버지의 40, 50대를 엿볼 수 있다면 이처럼 색다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지금 40대의 가장이 느끼는 부담감을 우리 아버지 스스로도 느꼈을 것이고, 지금의 경제나 환경을 탓하듯이 똑같이 우리네 아버지도 그 당시의 경제나 환경을 탓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의 40, 50대에 그 자식으로 살면서 이러한 것을 느끼면서 혹은 눈치채면서 자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저 우리를 탓하고 야단치시는 아버지가 원망할 뿐이었고,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인상이 서운했을 것이다.

이 책,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를 읽고 나서, 정말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신 저자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이제 내가 저자의 나이만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자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유였을까. 자식에게 엄하셨고, 호통을 치시는 장면이 마음 한구석에는 늘 자신의 능력 부족의 미안함과 못남의 자책감이 자리잡는 글귀에서 지금의 내 자식의 아버지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모두 다가 그랬듯이 자식에게 풍족하게 주지 못했음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다. 그 시절은 모두 다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을 탓하면서 자식에게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지금의 풍족한 환경에서도 나는 자식에게 그 시절의 아버지들만큼 자식에게 미안하거나 자책하는 마음이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나 자신에 너무 놀란다. 이전과 같이 대식구가 아닌 핵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마음 씀씀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깨닫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장성하여 자리잡는 것을 못보고 돌아가신다. 오히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이 책을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40대의 가장으로 우리네 아버지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하며, 그 시절의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나와 동급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더욱 아버지가 다가온다.

두 권의 서로 다른 형태의 아버지에 관한 책은 아버지와 나, 아버지 위치의 나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든다. 첫번째 책이 아버지 위치의 나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조망하는 책이라면, 두번째 책은 아버지와 그 아들인 가장으로써 나의 관계에 대해서 조망할 수 있는 책이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늘 달려가기만 하는 아비이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세월이 지나 가장으로써 아들이 자신의 위치에 놓이게 될 때 갖는 심정은 죽는 순간까지 걱정으로 가득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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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저자 : 베른하르트 슐링크

제목이 특이했다. 타이타닉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준 케이트윈슬렛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줄거리를 읽어보니 어린 소년과 성숙한 여성의 사랑이야기였으며 그렇다고 단순한 러브스토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날 말없이 떠난 그녀를 소년은 재판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죄목은 아우츠비츠 수용소의 관리자로 일하였으며 화재로 인해 교회에 갖혀 있던 여성포로자들을 일부러 타 죽도록 교회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때부터 그들의 사랑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머리속에서 싹 사라졌다. 태어날 때 부터 역사에 문외한인 나는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도 않았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읽어 내려갔지만 아우츠비츠 강제 수용소에 대해 알아보고 책 속에 등장했던 여러 요소들이 새롭게 와닿았다. 아우츠비스 수용소 이곳에서 유태인들이 대량 학살당했으며 독가스 사살,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도 실행됐었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무거운 역사적 배경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가볍고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영화로 제작된 소설이기에 줄거리를 쓸 순 없을것 같다. 아카데미시상식 수상작이니 영화의 작풍성도 어느정도 보장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상으로 확인해도 그 감동은 전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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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 들의 도시

문학 2009. 1. 20. 01:08

누구나 초등학교 (또는국민학교) 시절 들어보았음 직한 우리나라 속담. “눈가리고 아웅”, 오늘은 때거지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내용, 바로 포르투갈 작가 중 한명인 주제 사라마구가 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이다.

1. 내용은 이렇다. 어느 도시의 어느 한 사람을 필두로 전염병 처럼 번져가는 실명. 마른하늘에 날벼락 이라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정부는 이 질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미명아래 그들을 한 정신병원에 가둔다. 정신병원에서 자행되는 더러운 모습들. 눈먼 자들이 불을 내고, 밖으로 뛰쳐 나왔을 땐 이미 전 도시가 눈이 멀고 만다. 단 하나의 여자 (책에서 말하는 안과)의사의 아내를 제외하곤.

의사의 아내는 그의 남편과 몇 몇 실명한 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들을 돌본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과 도시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는 실명한 인간과 실명한 인간을 대하는 실명하지 않은 인간들 속에서 때론 실명한 것처럼 또 실명하지 않은 것 처럼 행동하며, 살아 남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진다. 마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2. 저자는 눈이 멀어가는 인간과 그들을 대하는 정부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과 이들이 이루는 사회(조직)을 그려내며 현실을 비꼬고, 의사의 아내에 인간의 선함을 그려냄으로써 부패한 현실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 주인공들이 눈이 먼 후 찾아가는 행복을 그리며,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인간의 목소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단어 아래 수 없이 자행되는 불법적인 악행들을 우리는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선한 소수의 목소리를 짓누기는 것을 보며, 우리는 눈먼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의심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3. 이 책의 구성이 상당히 독특했다. 독자의 집중력을 배가 시키는 구어와 술어가 구분되지 않는 문체. 누구인지 어디인지 알려 주지 않고, 특유의 묘사, 은유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하지만, 문제집 속의 답안지가 포함되어 문제를 푸는 재미가 떨어지도록 하는 것처럼, 책의 맨 뒤에 포함된 어느 교수의 설명은 저자의 의도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어, 독서 후 저자의 의도를 푸는 재미를 반감시켜버렸다. 

들리는 소리에 의지하여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본 모습을 보지 않고 손과 발로 형체를 생각하고, 찾은 먹이를 몰래 숨겨두고 혼자서 독차지하려는 눈먼자들의 모습. 잘못된 길을 바로 앞만 보며 걷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이제 그만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잘못된 길임을 인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나라가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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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은 게 대학 2학년 때쯤이니깐 지금으로부터 13년 정도 전인 것 같다.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워가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이 사람의 소설 중 처음으로 접한 건 '타나트노트'란 책이었는 데 사후세계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개미보다 더 먼저 읽었으니 대학 1학년쯤 이었을 테고 그 때는 그런 이야기에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라 사후세계가 정말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사실 타나트노트라는 책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제목 찾으려고 네이버를 뒤져 봤는데 검색 자동완성에 나타나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자동완성에 나올 정도면 요즘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긴 데 소재 자체가 시간에 상관없이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 ‘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읽은 책이 꽤 많다.

 

파피용그의 최신작을 접한 것은 TV였다. KBS에서 하는 단박 인터뷰라는 프로였는데 여기서 그 날 인터뷰이interviewee가 베르베르였다. ‘파피용한국 출간 기념으로 방한한 차에 인터뷰를 당한 모양. 아무튼 그래서 파피용이라는 책이 출간 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요즘 소설책을 좀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어서 이 책을 고르게 됐다.

 

뭐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 사람 책은 일단 읽고 나서 후회 할 일이 없는 듯하다. 소설은 장르를 불문하고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고 이 책은 그런 욕구를 잘 만족시켜 준다. 항상 독특한 소재로 글을 쓰는 이 사람 스타일 대로 이번에는 지구탈출이라는 재료를 삼아 재미난 이야기를 펼친다. 최고의 부자와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항해사가 만나 계획하는 지구탈출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반응, 닫혀진 세계에서 인간 군중이 어떻게 변해갈까에 대한 고민을 잘 버무려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 고민이 행복보다는 암울에 가깝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생각이 맞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성경에 맞닿는 결론은 솔직히 좀 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개신교를 좀 비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뭐 아무렴 어떠냐! 재미있기만 하면 되지! 이 책 재밌다.


Posted By 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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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집어 들었다. 사실 아들이 3박 4일 동안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아들  머리맡을 지키다가 넋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싫어서 이 책을 보게 됐다. 서점에서 베르베르의 ‘파피용’과 이외수 선생의 ‘하악하악’을 놓고 약 5분 가량 고민을 하다가 틈틈이 읽기에는 이 책이 더 날 것 같아서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선생이 인터넷 어디에선가 쓴 글들을 모아서 출판한 게 아닌가 하는데 정확한 정보는 아니고 순전히 내 추측이다. 선생의 삶의 철학,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인터넷을 바라보는 시각 등 수많은 선생의 생각들이 짧은 글 형태로 담겨 있다. 그리고 문장 하나 구절 하나 하나가 많은 공감과 사고(思顧)를 자극한다. 이외수 선생의 책은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이어 두 번째 책인데 (그러고 보니 둘 다 소설책은 아니다) 주제 넘지만 참 글을 잘 쓰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정말 글 쓰는 비법내지는 맛을 안다는 생각이다.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문장이란 게 단순히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마치 좋은 종을 쳤을 때 그 울림이 진하고 오래가는 것처럼 짧은 문장이지만 선생의 문장에서는 좋은 종을 쳤을 때처럼 진한 울림이 퍼져 나오는 것 같다.


 그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고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는 처지라면, 그대의 인생길은 당연히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많은 장애물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의 장애물은 하나의 경험이며 하나의 경험은 하나의 지혜다. 명심하라. 모든 성공은 언제나 장애물 뒤에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선생이 무릎팍도사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낭독했던 구절인데 그 때 이 구절을 들으면서 뭔가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시 첵에서 이 글을 보았을 때도 마음속에서 진한 울림을 느꼈다. 지식이나 재미를 주는 글은 많아도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글은 흔치 않다. 그리고 ‘하악하악’에서 선생의 글은 나에게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줬다. 내가 쓴 글이나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감동이나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저 선생의 그런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책에 두꺼운 것에 비해 읽는 데는 시간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한 두 시간이면 충분히 완독 가능한 분량이다. 대신 구절을 곱씹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들한테 강추!

그리고 이것도 역시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책에서 향기가 난다. 자꾸 향기가 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뒤져봐도 책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는 없다. ;;;, 아마 좋은 글에서는 향기가 날 수 있거나 아니면 내가 미친거거나.. 하악하악

이외수 지음 | 해냄
Posted By Bee
 

Posted by 시니어시니어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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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人

문학 2008. 3. 1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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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이 항상 개입되어 있다. 혹, 인간이 없는 광경을 보는 것도 인간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광경을 보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인간이 생겨나면서 이 세상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인간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개입은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양산해내고 있다.
이 세상은 인간이 당장 사라지는 시점부터 점차 많은 인공물들이 무너지고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심지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같은 건물이나 다리 역시 인간의 관리가 없어진 상태라면 채 20년도 못가서 부식이 되거나 붕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동안 배출해낸 산업 폐기물이나 쓰레기들은 그 후 수십만 수백만 년 동안 지속하게 될 것이며, 지구가 멸망한 후에는 라디오나 TV 전파만이 우주를 유유히 떠돌아다닐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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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현재로써 인간이 없는 지구는 현실 가능성이 극히 적다. 다만, 인류를 멸망시키는 위험 요소는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다. 특히, 인류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질병이 그 대표적인 예로 불치병이 그 전염속도를 가속화시킨다면 언제든지 인류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인류가 사라진 지구는 과연 인류가 남긴 것들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태평양과 같은 무한히 넓은 바다에는 조류의 흐름이 모이는 장소에 호주나 아프리카 땅덩어리만한 쓰레기 대륙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즉, 각 나라의 하천이나 강에서 떠 내려온 플라스틱과 같은 쓰레기들은 결국 지구 어딘가에 종착하게 되고, 이러한 쓰레기들이 마치 커다란 대륙을 이루듯이 지구상을 부유하고 있는 셈이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러한 쓰레기들을 다 치울수 있을런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최근 지구는 온난화와 더불어 부존 자원의 고갈이라는 위기를 피부로 느낄 만큼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우리들이 느끼는 온난화와 자원 고갈 (특히, 석유)은 실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전에는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 수 있는 방법을 논하라는 입사 면접 문제도 지금은 온난화의 덕택으로 결코 불가능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현재 알래스카에서는 기온이 상승함으로 안해 냉장고를 사용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고 한다.) 요즘과 같은 석유값의 가파른 증가 곡선은 후손이 석유를 과연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에너지 대체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

인간이 생김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발전했지만, 또한 결코 좋다고는 느끼지 못한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모두 인간을 위해서라는 결정된 답안을 정답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존재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인류를 위한다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잠시 빌려서 거처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Posted by El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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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김영하

문학 2008. 3. 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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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오랜만에 읽는 소설책이다. 기술서적이나 교양서적 위주로 책을 읽다 보니 소설은 잘 안 읽게 돼서 말이다. 사실 이 책, 소설인지도 모르고 샀다. 기술 위주로 포스팅이 올라오는 어느 블로그에서 우연히 보고 샀는데 - 그래서 당근 기술서적류인지 알았다. 책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사고 또 대부분 내용을 모르고 사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 책이 온 후에 보니까 김영하 장편 소설이라고 씌어 있어 살짝 쿵 당황했다. 책 내용도 확인 안 해보고 구입한 내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고 구석에 처박아 놨다가 며칠 전에 마침 읽을 책이 떨어져서 꺼내 보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단숨에 끝까지 읽어 버렸다.

 

내가 영화나 소설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순 명료한데 대단한 거는 아니고 그냥 재미 있느냐 없느냐 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 기준일 거다.) 내가 무슨 평론가나 비평가도 아니고 소설이나 영화는 그냥 재미있으면 그만인 거다. 소설하나 보면서 철학이 어떻고 내면적인 심리가 어떻고 하는 게 좀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소설을 무시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소설이 가져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요소가 재미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어렸을 적에 무협지에 빠져서 한 일 이년 동안을 허송세월()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무협지 한 천 권은 읽었던 것 같다. 대본소 무협지는 6~7권이 한 질이었는데 그런 걸 일주일에 2~3질씩 이년 정도 읽었으니 말이다. 읽은 거 또 읽은 적도 많다. 그러고 나서도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을 꽤 읽었었는데 대학 들어가고 다른 일들에 흥미가 생기면서부터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것 같다. 갑자기 무협지, 판타지 이야기를 왜 하냐 면 퀴즈쇼에서 어린 시절 읽었던 무협지(판타지) 소설에 대한 향수를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그 기분이 정말 나를 즐겁게 했다.

 

단순 명료한 내 소설 판단 기준에 따르면 퀴즈쇼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책을 읽는 내내 연애하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판타지 소설에 대한 추억들이 나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했다. 시대적 배경이 내 세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주인공이 80년 생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생각이나 느낌을 작가가 훔쳐보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만큼 우리 세대의 감성이나 사고를 정말 잘 표현했다. 작가가 우리 세대보다는 10년이나 앞서 세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젊은 세대의 감성을 이렇게나 잘 표현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물론 설정이 좀 황당하고 주인공 의식이 너무 극적으로 꼴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는데 설정이야 소설적 장치로 보면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것 같고 주인공 의식은 아마도 내 삶의 가치관이 정환(극중인물)을 많이 닮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튼, 오랜 만에 그것도 우연히 읽은 소설책 치고는 완전 대박이다. 좋아 하는 소설가가 몇 명 안 되는데(조정래, 신경숙, 이외수님 정도 ^^;;) - 사실 아는 분도 몇 명 안됨 - 그 리스트에 김영하님도 추가다.

Posted By Bee
Posted by 시니어시니어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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